권기수, 코리안 팝의 어떤 문법
최 범/ 미술평론가
리얼리즘으로서의 팝아트
나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팝아트는 리얼리즘이라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팝아트를 보는 다양한 시선이 있겠지만 리얼리즘이라고 보는 관점은 좀 의아하게 여겨질 것이다. 리얼리즘이라고 하면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이나 오노레 도미에의 <3등 열차칸>을 떠올릴 사람들에게 20세기의 현란한(?) 팝아트를 가리켜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공산주의의 공식예술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응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그것은 ‘광고’라는 답변이 있기는 하다. 그러면 팝아트도 광고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의미인가?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광고가 팝아트가 즐겨 다루는 대상인 것도 맞다. 그렇지만 팝아트가 광고는 아닌 것처럼 팝아트와 리얼리즘의 연결 또한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내가 팝아트를 리얼리즘이라고 말하는 것은 리얼리즘의 가장 기본적인 정의 즉 “사람은 자신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Il faut être de son temps)”라는 리얼리즘의 교의, 그것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팝아트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을 가장 잘 포착한 미술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팝아트가 리얼리즘이라는 나의 주장에 쉽게 반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팝아트가 그려내는 현실과 표현은 19세기 리얼리즘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전통적인 리얼리즘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라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있어야 되는 현실, 즉 사회주의가 도달해야 되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미술이다. 그러면 팝아트는 어떤 종류의 리얼리즘 미술인가. 소비사회와 자본주의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다는 점에서 팝아트는 분명 리얼리즘에 속한다. 다만 걸리는 것은, 팝아트가 현실을 그려내는 방식이 19세기의 리얼리즘이나 20세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이를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바로 오늘날 팝아트를 이해하는 첩경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먼저 리얼리즘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천착해보기로 하자. 우리가 리얼리즘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질라치면, 무엇보다도 먼저 서구 형이상학 철학의 전통을 떠올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현실(the real)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 없이 리얼리즘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물음을 던지자마자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왜냐하면 서구 형이상학 철학에서 말하는 현실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현실(reality)은 눈에 보이는 현실(image)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 세계(world of idea)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구 형이상학 철학에서 리얼리즘이라는 문제는 눈에 보이는 현실의 외면(image)이 아니라 현실 너머의 배후에 있는 어떤 실재(reality)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의 외면과 철학적 현실의 관계를 묻는 것이 바로 서구 형이상학 철학이 근본적인 과제였다.
철학적 리얼리즘이 그러하듯이 미술적 리얼리즘 또한 생각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외면을 그대로 그리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철학적·미학적 물음의 대상이거니와, 아무튼 어떤 대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흔히 드는 예처럼, 열 명의 화가가 하나의 나무를 그린다고 할 때 그 형상이 모두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미 대상(실재)과 재현(이미지)의 복잡한 관계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우리 주제로 돌아와서 팝아트를 리얼리즘으로 본다는 것은 팝아트가 대상(실재)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이미지)하는가에 대한 판단과 인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진술이 된다. 앞서 리얼리즘은 단지 현실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것이다. 모든 리얼리즘은 이미 현실의 재현 이전에 현실에 대한 인식, 즉 일정한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리얼리즘은 무엇보다도 먼저 현실과 재현의 관계에 대한 어떤 인식론적인 판단이다. 그런 점에서 리얼리즘은 단순한 재현미술(representative art)이 아니다. 거기에는 벌써 현실을 현실 그 자체로 수용하는 것이 아닌, 현실을 바라보는 어떤 문제의식이 들어 있는 것이고, 역시 그런 점에서 리얼리즘은 그 배후에 아이디얼리즘, 즉 이상주의(idealism)를 이념으로 깔고 있는 관념적인 미술(idealistic art)이라는 역설도 성립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제 리얼리즘은 단지 현실의 겉모습을 그려내는 재현미술이 아닌, 나름 진지한 미술, 즉 서양의 인문주의(humanism)적 전통에 속하는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소비문화를 찬양하는 듯이 보이는 팝아트가 진정한 리얼리즘일 수 있을까. 달리 말하면 일견 가볍기 짝이 없어 보이는 팝아트도 유구한 서양 인문주의 전통에 속하는 순수예술(fine art)일 수 있을까 하는 말이다. 여기에 밝혀야 할 팝아트의 비밀이 있다. 아무튼 팝아트는 19세기적인 리얼리즘일 수도, 20세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일 수도 없는, 20세기 후반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으로서 자신의 독특한 위상을 정립해야 했다. 그러니까 한없이 가볍고 피상적으로 보이는 팝아트도 사실은 저 르네상스로부터 유래하는 휴머니즘의 전통, 즉 인문주의적인 깊이를 내장하고 있다는 말이며, 이것은 알기 위해서는 서구 미술사에 대한 내재적 접근이 필요한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더 이상 다루지 않기로 한다.
오리엔탈 팝아트의 구조
그런데 이러한 서양의 팝아트가 동양에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선 재패니즈 팝을 보자. 앞서 서양의 팝아트가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서양 미술의 ‘자기참조적(self-referential)’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팝아트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그러한 내재적·자율적인 구조를 알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에 비하면 동양의 팝아트는 서양의 팝아트와 달리 미술사의 내재적이고 자기참조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물론 팝아트가 서양에서 온,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양의 팝아트는 기본적으로 혼종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화의 혼종성, 이것이 바로 동양 팝아트의 특징이다.
재패니즈 팝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팝아트라고 불리는 차이니즈 팝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동양의 팝아트는 바로 이러한 문화의 혼종성(hybridity) 자체가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혼종성이 바로 동양 근대의 현실(reality)이라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동양의 팝아트는 기존 동양 미술사의 전통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서양 미술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참조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다만 서양 미술사와는 달리 하나의 접합, 이질적인 것의 수용과 접합으로서의 내재성, 외재적인(external) 것으로서의 내재성(internality)이라는 다소 모순적인 표현으로 그것을 지칭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양의 팝아트는 파롤이 아니라 랑그라고 할 수 있다. 발화가 아니라 문법이라는 것. 그러니까 동양의 팝아트는 서양의 팝아트를 동양의 전통과 결합시키는 것인데, 여기에서 드러나는 방식 자체가 동양 팝아트의 문법이자 미학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과거 중국에서 불교를 수용할 때, 기존의 중국적 전통에 따른 ‘격의불교(格義佛敎)’라는 방식으로 수용한 것과도 유사하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문법 자체가 바로 동양 팝아트의 구조이자 주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문법은 작가에 따라서 개별적인 파롤로 나타나겠지만, 동양 팝아트의 주제는 서양 팝아트와 같이 미술사 전통에서의 자기참조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동양과 서양의 만남 같은 문명론적인 것이 주제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별 작가의 개별 작업은 이러한 구조 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발화(發話)이다. 권기수 역시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자신의 파롤을 전개하고 있다.
권기수와 코리안 팝
자기참조적인 미술사가 아닌, 이질적인 것의 혼종으로서의 문화적 상황을 다룬다는 점에서 권기수의 작업 역시 오리엔탈 팝아트에 속하며, 그런 점에서 재패니즈 팝, 차이니즈 팝과 계열을 같이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권기수의 작업이 서양의 팝아트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일본이나 중국과 같은 오리엔탈 팝 내에서 그것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다시 말하면 코리안 팝을 재패니즈나 차이니즈와 구별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서양의 팝아트와 동양의 팝아트를 크게 다른 것으로 각기 묶음을 하고, 그 안에서 재패니즈 팝과 권기수의 작업의 차이를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코리안 팝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코리안 팝아트를 이야기할 때 서양의 팝아트와의 비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미술사적 상식 정도로만 알면 되는 것이고, 정작 코리안 팝의 정체성은 웨스턴 팝과의 비교가 아니라 오히려 인근 오리엔탈 팝, 그중에서도 재패니즈 팝과의 비교를 통해서 잘 드러날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재패니즈 팝과의 공통점과 차이를 밝혀내는 것이 코리안 팝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지렛대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웨스턴 팝과의 커다란 차이는 이미 말했고, 그럼 이제 재패니즈 팝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재패니즈 팝 역시 서양과 동양의 혼종성이 주제이다. 그래서 그것은 재패니즈 리얼리즘이 될 수 있다. 근대화 이후 가장 중요한 현실은 서구화, 그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말을 바꾸면 재패니즈 팝은 화혼양재(和魂洋才) 또는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일본식 근대화의 현실을 다룬다. 그런 점에서 재패니즈 팝은 리얼리즘일 수 있다. 대체로 일본 팝아트 작가에게서 나타나는 양상들은 당연히도 일본 전통과 서양 현대의 혼종성이 주제이다. 그것은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처럼 그로테스크하기도 하고 아이다 마코토(合田誠)나 나라 요시토모(奈良美智)처럼 순진함(어린아이스러움)과 어른스러움(서양 오랑캐적인)의 기이한 결합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권기수에게서 그러한 혼종성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먼저 권기수 작업에는 재패니즈 팝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그로테스크함이 없다. 이건 정말 조선적인 특성일까.
앞서 서양의 팝아트가 자기참조적인 내재적 비판, 이는 달리 말하면 르네상스에 의한 현대 비판, 즉 서양 팝아트가 여전히 엘리트 고급미술인 이유는 그것이 르네상스 이후의 인문학으로서의 미술 전통에 속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달리 말하면 16세기 르네상스 정신에 의한 20세기 소비문화의 내재적 비판이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팝아트에 내재되어 있는 냉소적인 느낌은 사실 르네상스적 리얼리즘에 의한, 그리고 19세기 리얼리즘과도 통하는, 어떤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것이야말로 진짜 현실이고 이 세상의 현실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형이상학적인 위계의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고자 하는 팝아트는 정작 이 천박하고 피상적인 자본주의의 현실을 그대로 끌어안지는 못한다. 그 안에는 여전히 르네상스의 신(新)플라톤주의자가 들어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재패니즈 팝에는 근엄한 형이상학자가 들어 있지 않다. 재패니즈 팝의 문제의식은 일본의 전통과 서양의 현대가 만나 빚어내는 현실의 그로테스크함이다. 재패니즈 팝은 서구 현대문화에 지배되고 있는 일본의 현실에 대해서 불편해하는 것이 주제이다. 그래서 재패니즈 팝은 행복하면서 불편한, 좋아하면서 미워하는(츤데레?) 이런 일본 나름의 리얼리티를 잘 포착하고 있기 때문에 뛰어난 현대미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카스테라가 쾌감, 기름에 튀겨낸 돈까스의 어떤 기발함. 일본의 성공적인 근대화, 비서구 지역에서 유일하게 자주적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위대함과 역설적으로 그것이 주는 기이함. 좋지만 이상한. 어쩐지 크리스탈 같은.
그러면 재패니즈 팝과의 비교를 통해서 밝혀내야 할 권기수의 작업, 코리안 팝은 뭐가 같고 뭐가 다른가. 권기수만이 아니라 코리안 팝이라고 불리는 작가와 작업들에는 웨스턴 팝의 내재적 비판은 말할 것도 없고 재패니즈 팝에서 드러나는 그로테스크함이 없다. 어떤 면에서 코리안 팝이야말로 팝아트의 역사에서 가장 밝고 명랑하다. 이런 것도 팝아트가 될 수 있을까. 만약에 코리안 팝에서 웨스턴 팝과 같은 르네상스적인 자의식도, 재패니즈 팝에서 느껴지는 문명의 혼종성이 주는 이물감과 그로테스크함도 없다면, 그것은 코리안 팝이 아무런 의식도 없는 얄팍함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서양 미술의 진지함도 일본 미술의 자의식도 없는 그냥 행복의 미술 그 자체가 코리안 팝의 실체인 것일까. 코리안 팝 역시 혼종문화의 산물이라면 거기에는 분명 한국식 문화접합(cultural articulation)의 흔적, 자국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코리안 팝은 그냥 저급한 모방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먼저 눈에 띄는 코리안 팝의 특징으로 캐릭터화를 들 수 있다. 웨스턴 팝에는 캐릭터화가 없다. 재패니즈 팝에는 나라 요시토모의 소녀랄지 역시 아이다 마코토의 변태적인 소녀들, 무라카미 다카시의 피규어들이 있지만 하나의 단일 캐릭터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코리안 팝은 캐릭터화가 대세다. 이동기부터 시작해서 찰스 장, 아트놈, 강영민, 낸시랭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작업에는 캐릭터가 중심이 되고 있다. 코리안 팝의 캐릭터화 경향은 이 자체로 연구의 대상이 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캐릭터들이 정말 현대 한국 문화 속에서 어떤 상징과 의미를 가지는지도 물어보아야 한다. 이는 좀 더 탐구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다만 나는 여기에서 한 가지, 권기수의 캐릭터 <동구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따져보고자 한다. 권기수는 자신이 캐릭터화 계열의 팝아트 작가로 분류되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나는 권기수의 <동구리>가 다른 작가들의 캐릭터와는 다른 역할을 한다고 보는데 이를 밝힘으로써 권기수 작업의 의미와 코리안 팝의 구조를 잘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 시작해볼까.
핀볼 <동구리>의 대활약
영국의 전설적인 록 그룹 <더 후(The Who)>의 노래 중에 <핀볼 위자드(Pinball Wizard)>(1969년)라는 곡이 있다. 핀볼 게임(pinball game)에 재능을 가진 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권기수의 작업을 보면서 이 노래를 떠올린 것은 왜일까. 그것은 권기수 작가의 캐릭터 <동구리>가 핀볼처럼 동글동글하게 생기기도 했지만 통통 튀면서 여기저기를 날아다니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히 권기수의 작업에 대해 ‘동양화와 팝아트의 만남’이니 하는 상투적인 표현이 싫다. 왜냐하면 그것은 권기수의 작업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동구리>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아무튼 권기수의 <동구리>는 핀볼처럼 통통 튀며 여기저기를 날아다닌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도 날아가고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위에도 내려앉는다. 그리고 화면에는 색동 같은 막대 선(線)들이 빗줄기처럼 죽죽 내려온다. <동구리>은 그 빗줄기 사이를 뚫고 막 돌아다닌다. <동구리>가 권기수의 아바타임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는 다른 작가들의 캐릭터와 다르지 않다. 다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권기수의 <동구리>가 맡은 역할이 다른 작가들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핀볼처럼 통통 튀어 다니는 <동구리>에 의해서 어떤 시니피에들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동구리>는 전통적인 산수화의 아우라를 벗겨낸다. 동양의 산수화는 단지 자연을 그린 풍경화가 아니다. 그것은 동양 전통사회에서의 어떤 이상향의 표현이자 모든 권리원천의 표상이다.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듯이 왕도 둘이 아니며, 군자와 소인은 하늘이 낳은 천분(天分)인 것이며 이들은 모두 단 하나의 실체로부터 유래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연이다. 따라서 동양의 전통적인 산수화는 풍경화를 넘어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표현이자 동시에 무시무시한 계급 지배의 이데올로기를 담아내는 프로파간다 아트이기도 한 것이다. 산수화는 선전화(宣傳畵)이다.
<동구리>가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동양화의 아우라를 깨부수는 것이다. 그래서 권기수의 작업은 동양화의 현대화가 아니라 오히려 동양화를 해체하는 전복적인 회화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동구리>는 해체의 아이콘이다. 그런 점에서 <동구리>의 웃음은 묘하다. <동구리>는 기본적으로 스마일 아이콘 계열에 속한다. 전설적인 스마일 아이콘부터 시작해서 웨민쥔(岳敏君)의 웃는 얼굴들까지 팝아트에는 스마일이 많이 등장한다. 웃음에 대해서는 베르그송에서부터 바흐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해석이 있지만, <동구리>의 웃음은 베르그송의 웃음(긴장의 해소)도 바흐친의 웃음(민중의 얼굴)도 아닌 어떤 해체적인 것으로서의 웃음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동구리>는 웃지만 웃지 않는다. 웃지만 웃지 않는 것, 사실 이것이야말로 <동구리> 최대의 비밀이다.
그래서 나는 ‘동양화와 팝아트의 만남’ 같은 상투적 명제가 권기수를 이해하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권기수의 작업은 ‘동양화의 팝아트의 만남’이 아니라 오히려 동양화를 해체하는 것으로서의 팝아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권기수의 작업을 ‘해체주의 팝아트(deconstructivism pop art)’라고 이름 붙여 볼 수 있을 듯하다. <동구리>가 웃지만 웃지 않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래서 그것은 재패니즈 팝의 탈아입구적인 웃음이나 차이니즈 팝의 아큐(阿Q) 같은 웃음과도 다르다. 탈아입구적인 웃음이 성공적인(?) 근대화에 대한 뿌듯함과 함께 어떤 기이함의 표현이라면, 웨민쥔의 그림 속의 웃음이 아큐적인 어떤 어이없음의 폭로라면, <동구리>의 웃음은 어쩌면 아직 파안대소할 수도, 그렇다고 냉소할 수도 없는, 웃지도 울 수도 없는 어떤 한국적 근대의 현실에 대한 표정 관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거기에는 한국 근대의 혼종성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강박관념 같은 것이 스며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러한 의구심을 안고 <동구리>는 오늘도 그렇게 열심히 핀볼게임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핀볼 <동구리>의 대활약을 기대한다.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