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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수, 예술이 삶이 될 때

 

이민수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초빙교수)

 

권기수의 작품을 전시장에서 마주한 관객들은 대체로 그 화려함과 섬세함에 놀라게 된다. 다채로운 색상, 세련된 캐릭터, 금박으로 반짝이는 화면과 매끈하게 마무리된 표면은 흡사 오랜 시간 장인의 손길을 거친 공예 작품, 또는 고급스러운 디자인 제품을 연상하게 한다. 감탄이 절로 나는 치밀한 기법에 대한 궁금함이 앞서, 그려진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권기수의 작업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도 알려져 있는 동구리를 포함한 인물이다. 두 번째는 그 인물이 속해 있는 공간이다. 이 공간은 이상적인 자연의 표상이기도, 순수한 회화적 공간이기도, 또 실제의 물리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요소는 이다. 작가가 직접 조합한 600여 색상의 제작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의 색채를 구사한다.

상황을 종합해볼 때 권기수의 작업은 분명, 동양화를 전공한 그의 이력에 잘 부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다분히 의도적인 작가의 선택이자 전략인 걸까? 이를테면 작업의 근간에 동양화 전공자의 능력치를 숨겨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어쩌면 이런 가늠 역시 필자를 포함한 우리 미술계가 가진 동양화또는 한국화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에 따른 것은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권기수의 작업은 그 지표로서 중요하다.

 

점경인물에서 동구리로

1998년 첫 개인전에서 그는 IMF 사태로 힘들어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당시 한국인의 초상이라 할 수 있는 수묵인물화를 선보였다. 지친 표정, 늘어진 어깨에 서류가방, 책가방과 같은 저마다의 무거운 짐을 지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흑백의 등신대 인물상들을 오려내 전시장 벽과 바닥, 복도와 계단 곳곳에 부착해 구현한 전시였다. 이와 관련해 작가는 수묵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화면을 벗어나 현대적인 공간까지 여백이 확장되는 설치를 병행한 실험이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한국 사회의 현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인물에 담아내고, 기존 수묵 전통의 문법에서 탈피해 시대에 맞는 표현 방법을 모색하는 것, 이것이 권기수 초기 작업의 특징이다. 특히 작품 속 주요 요소인 인물의 경우 오려낸 인물에서 웃는 사람드로잉을 거쳐 동구리로 변모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그는 이 변화 과정의 주요 계기로 자신의 홍익대 동양화과 대학원 졸업 논문을 들었다. 조선 후기 중인계층, 즉 여항화가(閭巷畵家)들의 의의와 한계 -이를테면 그들의 반골의식 부족- 를 정리하며 그는 더 이상 문인이 존재하지 않는 오늘날 작가의 역할과 수묵화의 방향성을 타진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 직접적인 영향으로 2002년에 동구리가 탄생했다. 권기수 작품에서 동구리는 전통 산수화 속 점경인물(點景人物)을 대신해 기승 절경을 여행하며 자연과 교감하기도 하고, 고사(故事)의 등장인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동구리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궁극적으로는 작가의 -자화상이기보다- 사회적 가면, 페르소나(Persona)’에 가깝다.

작가에 따르면 초창기 동구리는 먹물이 흘러내려 웃는 듯 우는 듯 기이한 모습이었으나, 주어진 전시 공간을 고려해 컴퓨터로 형태를 다듬어 인쇄를 거쳐 전시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가 “사회의 요구에 맞추느라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는 저 자신을 그린 것이라 밝힌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동글동글한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짓고 있는 동구리는 모나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작가의 의지(?)를 담고 있다.

 

옛 그림 속 이상향에서 회화적, 현실적 공간으로

권기수의 작업에서 동구리가 속한 공간은 전통 산수화나 고사화에 나오는 이상향의 자연을 오늘날의 현실적, 회화적 공간으로 옮겨낸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중국의 위·진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과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등을 차용하고, 동구리를 통해 현실에 대한 도피,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해왔다.

또한 그는 소상팔경이나 관동팔경을 주제로 한 옛 그림이나 사군자(매梅·난蘭·국菊·죽竹)에 착안해 이를 자신의 방식대로 재해석한 공간을 제시하기도 한다. 산과 물과 돌, 켜켜이 쌓인 바위 기둥은 단순한 실루엣과 반복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바뀌어 재구성되고, 대나무와 도원의 복사꽃 역시 컬러 블록과 패턴으로 변환되어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이제 옛 그림 속 이상향의 공간은 회화적, 또는 작품이 놓인 물리적 현실의 공간으로 바뀌었고, 그 곳에서 노니는 점경인물은 동구리가 되었다. 이처럼 현대적 감성으로 전환되면서 그림의 의미와 역할도 사실상 달라졌다. 전통 산수화가 문인들이 여기(餘技)로 그려 의중을 풀어낸 그림, 즉 시서화 겸비 차원의 수행과 자기충족적 가치관에 기초해 오직 서로 간의 감상과 품평을 위한 것이었다면, 권기수의 작업은 관람자가 동구리에 감정이입해 이상향으로 표상된 자연과 순수한 회화적, 또는 현실의 공간 안에서 즐기는 감상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매매의 대상이다.

 

성스러움과 속됨을 오가는 색채

권기수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무엇보다 색채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홍익대 학부시절 지도교수는 1980년대 수묵운동을 주도한 남천 송수남이었다. 그 여파로 1990년대 초반까지도 동양화과 실기실에는 수묵 위주 작업이 주를 이뤘다. 권기수 역시 학부에서 수묵으로 사군자와 문인화, 도시풍경화, 인물화 등을 익히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다만 동양화과 입학 초부터 그가 가졌던 의문은 화려한 현대도시에 살면서 왜 시커멓게만 그려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작가에 따르면 이런 상황이 점차 색에 대한 욕구를 증폭시켰다고 했다. 여기에 그가 대학원 입학 전 광고회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컴퓨터로 영상과 디자인 작업을 한 경험이 더해져 현재의 작업 스타일을 갖추게 되었다. 권기수는 컴퓨터로 아이디어 스케치를 구체화하고 체계적으로 색상 번호표를 부여한 다음, 스튜디오 직원들과 함께 300시간이 넘는 공정을 거쳐 다채로운 색감의 시각적 화려함과 장인의 섬세함을 갖춘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이른바 ‘21세기 테크놀로지 시대의 수공예품 생산과 같은 모순적 결합은 이렇게 탄생했다.

2020년 이후 공개된 그의 신작에서부터 등장한 금박 역시 모순적 관계를 내포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금은 신성과 권위, 부를 상징하며 종교화나 최상층을 위한 예술에 사용되었다. 이토록 귀하고 비싼 금을 사용해 권기수는 황금 동구리와 멍멍이를 선보인 바 있고, 최근에는 화면 일부 또는 아예 바탕 전체에 금박을 붙이고 그 위에 그리기도 한다. 각도에 따라 찬란히 빛나는 금색으로도, 누렇게 바랜 황갈색으로도 보이는 탓에 그야말로 성()과 속(), 영원성과 순간성을 넘나드는 것이 바로 금이다.

 

예술이 삶이 될 때

동양화단의 이단’, ‘서양화 매체로 동양화를 표현’, ‘한국화의 정신을 재해석한 팝아트, 권기수의 작업에 붙는 여러 수식어가 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예술가는 이기적인 인간이라 저는 저 자신을 표출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작품을 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가 살면서 경험한 많은 것들이 누적되어 이뤄진 정체성과 그 삶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곧 그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권기수의 작업은 화려하고 발랄하지만은 않다. 그의 초기 작업이 그랬고, 알록달록한 작품들 사이에 어김없이 끼어 있는, 흘러내리는 먹과 물감이 분출하는 우는 동구리작업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심리학자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에 따르면 페르소나는 개인이 사회가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가면이자 생존의 전략이다. 그렇기에 웃는 동구리는 마치 그림자처럼 우는 동구리와 함께 할 때 비로소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동양화 또는 한국화를 일종의 페르소나로 본다면, 권기수의 작업은 앞으로 이 장르의 잠재력을 깨우쳐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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