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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는>

동구리 20

 

주먹질은 해도 뼁끼질은 하지 말라는 소백산 아래 산골에서 그는 환쟁이 소년이었다그 산촌 사람 중 한 명인 아버지는 뼁끼질을 하고 다니고 있는 아들이 어떤 대학이 갔는지 설명하기도 어렵고 해서 누가 물을라치면 그냥 대처에 있는 학교에 진학했다고 말하고 다녔다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칠십년대 초반 산골 농촌이란 아직 30,40년대와 별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깥 구경을 한 사람은 월남파병 군인이나 사우디 같은 데를 갔다 온 노동자들 정도가 고작이었다궁벽한 곳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건 지경 밖으로 나가질 않고 살아왔다는 뜻이기도 했다땅은 잠시라도 사람이 떠나 있으면 온전히 건사할 길이 없었다그의 아버지 어머니 팔자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림에 관해서 그는 고향을 떠날 때까지 달리 선생이란 존재가 없었다누구에게 아예 배우질 않았다는 게 아니라 미술대학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데쌍’dessin을 학원에서 거듭 익히는 정도였다하물며 뼁끼질하는 소년 주제에 선배들과는 다른새로운 그림에 도전한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정확하게 말해서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다분명한 건 지역 그림대회에 나간 그가 대부분 입선에 그칠 정도로 제도권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학원도 열심히 다니질 않았고 수상권에 들 수 있을 만한 꾀도 없었다이상한 건 그때 대상을 받거나 한 친구들 중 지금까지 그림 그리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어찌 되었든 그는 서울에 있는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붙었고기대와는 달리 이내 거기서도 그닥 환영 받질 못했다수묵이 싫었던 건 아니지만 전통 수묵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일은 내키질 않았다그저 시커먼 그림보다 자기 방식대로 그리고자 했다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몰랐다적어도 다들 이전부터 해왔던 방식으로는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그러자 함께 그림을 도모해보자 했던 벗들이 시나브로 그를 떠나고 있었다교수들은 희다 검다 말이 없더니 곧 그의 작업에 관심을 주질 않았다소싯적처럼 그는 다시 선생이 없었다세상에는 재능 있고 명망 높은 사람이 많았지만 그는 따르고 배우고 모실 스승이 없었다대학원까지 들어가서 사람과 길을 찾았지만 역시 허사였다

 

그는 아무 이름이 없었다아무도 그를 몰랐다누가 그를 부르지도 않았다그의 그림에 관심을 주는 이는 더구나 없었다그는 화가였지만 정작 화가가 아니었다이 무렵 그가 부질없이 한 행위는 아무 노래나 틀어놓고 노래 한 곡이 끝나면 그림을 함께 끝내는 습관을 길 들이는 일이었다무슨 대단한 경지를 위한 것도 아니었고 새로운 경이를 발견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다만 그림을 놓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어떤 계획도 없이 붓을 들고 환을 치다가 노래와 함께 한 작업을 마쳤다아직 그는 어떤 존재도 아니었고 그림도 모종의 열망 따위를 품고 있지 않았다고 해야 옳다붓을 들어 먹을 치는 동안 그림 그린다는 사명감도대학 나온 사람이라는 생각도그림으로 돈 한 푼 벌지 못한 채 굶고 있다는 초라한 생각도 다 내려놓았다지독스럽게 반복하는 붓질을 하는 동안은 묘한 해방감 같은 게 일렁거렸다그뿐이었다배운 모든 것을 내버리기라도 하듯 그는 붓질만 했다석삼년 뜻없는 작업을 거듭하던 어느 날 시커먼 먹빛 사이에서 어떤 존재 하나가 숨어 있다가 나타났다그건 분명 그가 그린 것이었지만 굳이 그걸 그리려고 의도하질 않았던 것도 맞다누군가 전시회를 하자고 제안해 와서 그림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있을 때 그게 문득 드러났다나중에 ‘동구리라고 이름 붙인 어떤 존재였다동구리가 세상에 출현하면서 비로소 그 또한 미미한 이름을 얻었다화가 권기수다.

 

대략 2000년 어름이었다. 1999년이라고 해도 좋았고 2001년이라고 해도 그만이었다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어차피 그 무렵 시간은 불투명한 액체처럼 헝클어져 있거나 한데 뭉쳐 있으니까그때 그는 어디서 쓰러져도 홍길동이었고 연유없이 사라졌다고 해도 무방한 임꺽정이었다동사무소 문서신청 작성 본보기 양식에 박혀 있는 한낱 그런 존재였다동구리가 똑 그랬다.

 

동구리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는 존재다동구리는 익명이다익명으로 존재하고 익명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도처에 기거하지만 아무 데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 근대사회 이후 대중의 익명성을 나타내는 존재는 그렇게 출현했다조금 고상하게 말하자면 부존으로써 존재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동구리다늘 함께 하지만 함께 살지않는다른 한편 굳이 찾지 않아도 거기 있는 존재다어디 있거나 어색하지만 어울리고고독하지만 기쁘고슬픈 듯하지만 현재를 희미한 존재로 살아내고 있는 흰 얼굴 인간 형상이다.

 

동구리는 남자이고 여자이고성별이 없다머리털이 열 가닥 돋은 별볼일 없는 하찮은 운명으로 그는 21세기 대낮에 나타나서 권기수의 그림에 은닉되어 있거나 별 표정없이또 목적도 이념도 없이 서성거린다그렇다고 동구리는 그림 중심 소재도 아니고 주인공은 더욱 아니다그는 권기수의 모든 그림에 거처할 따름이다그는 철저히 익명이다한국 회화 사상 처음으로 작가의 그림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도형화기호화된 인격체가 동구리다.

 

동구리의 얼굴 모양은 원형으로 동그랗고단추구멍 만한 눈삼각뿔 모양을 한 코에입 모양은 길게 벌어졌지만 웃는지 우는지 실은 알 수가 없다그는 모든 그림에서 무엇인가 하고 있지만 무엇인가 하고 있질 않다때로 관조하고때로 빤히 쳐다보고때로 움직이고 있다고 해서 동구리는 딱히 주제에 영향을 줄 만한 어떤 작용을 달리 적극적으로 하지도 않는다그래야 동구리다귄기수 그림을 보는 사람이 어렵지 않게 동일시를 이뤄내는 지점이 여기다거기서 관객은 익명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름 또한 그렇다맞춤법을 잘 모르는 표기를 한 양 동그리가 아니고 동구리다. ‘동그리보다 발음하기 좋고 그저 동구리 만큼 조금 다를 뿐이다동구리는 권기수 그림에서 기표signifiant기의signifié는 없거나 모른다그래서 동구리다.

  

처음 그림이라는 형식을 갖고 동구리가 공식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곳도 밥집이다그는 근사한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존엄을 갖추고 나오질 않았다월전미술관 별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밥집 콩두 바람벽이 동구리 탄생지다권기수는 거기서 동구리가 특유의 얼굴을 내미는 전시를 처음 열었다그해는 2002년이었다월드컵 경기에 몰입한 채 함께 몰려다니고 있는 거대한 군중 틈바구니에서 동구리는 소리없이 태어났다.

  

그가 이윽고 스무 살이 되었다스무 살이 되었지만 동구리는 나이를 먹거나 하질 않는다이 전시는 스무 살 동구리의 내력을 밝히고 탐구하는 자리이자동구리와 대화하는 동구리들의 잔치다그리하여 이름없는 자들의 이름을 부른다동구리들아.

 

서마립 (예술비평)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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