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고사(高士) 동구리, 새로운 전설의 시작
이건수 미술비평·전시기획
동양의 전통산수화를 보면 그 거대한 풍경 속에 꼭 등장하는 작은 인물상이 있다. 나무와 수풀 사이로, 산과 계곡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쓸쓸한 사람, 배를 타고 무언가를 낚고 있던가 수면을 바라보며 유유자적함에 빠져 있는 세속적이지 않은 사람의 모습은 인격의 완성은 자연과 함께, 자연의 완성은 인간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동양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자연의 심성을 품지 않은 인간은 무뢰하며, 인간의 개입이 없는 자연은 공허하다. 인간은 자연이 품고 있는 진리의 도에 다다르기 위해 그림 속으로 진입하며 그 도정을 우리 앞에 열어 보여준다. 그 고독하고 고고한 작은 인물의 의미를 우리시대의 화면 속에 부활시킨 우리시대의 고사(高士)가 권기수이다.
그는 공적인 데뷔(1998년)부터 남달랐다. 현대 대중사회의 이름 없는 흑백 군상들의 실루엣을 컷팅하여 전시장 공간에 자유롭게 부착하여 설치한, 기존의 상상을 초월한 이 젊은 한국화가의 전시는 전통적인 지필묵의 한계 속에 묶여져 있던 한국화의 경계를 한층 확장시킨 획기적인 시도였다.
1980년대부터 서서히 본격화되기 시작한 한국화의 혁신과 실험은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더욱 과감해지고 진지해지면서 일찍부터 논의 되었던 전통적인 한국화의 부진함을 일소시키는 다양한 형식들의 출현이 이어졌는데 당시 권기수는 떠오르는 신예의 참신함으로, 같은 세대의 한국화가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종의 몰입형 전시를 한국화의 토대 위에서 구현해낸다. 한국화를 매개로 한 인터렉티브한 소통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한국화의 동시대적 감수성과 사회적 관계성에 대한 한 방편을 제시해준 의의가 큰 전시였다.
화이트큐브에서의 상투적인 한국화의 소통 방식을 해체한 그는 보다 광범위하고 비물질적인 재료로서 한국화의 무게를 보다 가볍게 만들어보고자 했다. 수묵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을 통해 한국화의 매체적 전환과 혁신으로 한국화의 영역을 초월한 공감대를 획득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젊은 한국화가가 할 수 있는 동시대적 답변으로서, ‘수묵화가도전기’라는 수묵동영상 그룹운동을 통해 한국화의 현대적 변용과 대중적 호소에 연구와 도전을 이어갔다. 전기의 <매화초옥도>,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에 내러티브를 입히면서 전통적인 문인화의 정서를 미디어아트적인 전략에 담아 한국화를 이 시대 속에 살아있는 현재진행형의 장르일 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호감을 이끌 수 있는 예술소비재로서 환골탈퇴하려는 시도를 선구적으로 하였던 것이다.
1999년에서 2001년 사이, 이때 자연스럽게 등장한 캐릭터가 동구리이다. 전통적인 산수화나 수묵문인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형상을 간략화 하다가 남게 된 이 기호이자 부호 같은 아이콘 동구리는 작가 자신의 분신이자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전통산수화 속엔 간소한 초옥 속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 봇짐을 지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 나그네의 얼굴이 들어 있다. 서구적인 퍼스펙티브에서는 보이지 않을 얼굴의 이목구비가 간략하게 그려진 이들의 얼굴은 동양화가 시각적 감각의 원칙이 아닌 관념적 인식의 원리 속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우리의 선비들은 자연의 법칙과 우주의 원리를 품고 있는 자연을 생활 환경 속에서도 가까이 하기 위해 방 안에 족자 형식의 산수화나 수석을 두고 그것을 감상함으로써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잊지 않으려 하였다. 동양이 이미 선취한 삼원법과 같은 탈원근법적인 시점의 이동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상징하는 이 등장인물의 시선과 함께 전개된다. 그림 속에서 등장하고 이동하는 인간의 시점에 의해 새로운 풍경과 광경이 펼쳐지며 우리의 산수화는 깊이와 내러티브를 획득하게 된다. 그 전통화 속의 등장인물은 동구리와 같이 작가의 아바타로서 혹은 화자(話者)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동구리의 인도를 통해서 관객은 그림 속에 개입되면서 근본 바탕화면이 지니고 있는 미술사의 역사적 레이어에 참여하고 뒤섞이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뭉크의 <절규>의 주인공 역할처럼) 동구리로 인해 그림 속 풍경은 작가와 관객의 현실이 되고 화면의 평면적 한계를 벗어난 입체적 체험의 스토리텔링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백제의 미소, 신라의 미소 등 고대적 시간의 미소를 연상케 하는 동구리의 미소는 일견 웃는 입으로 보이지만 웃고 있다는 직설적 감정의 표현으로만 읽혀지지 않는다. 캐릭터의 처해진 상황과 문맥에 따라서 그 웃음의 부호는 다르게 읽혀지며 화면에 고유한 정서를 부여한다. 마치 하회탈의 웃음 뒤에 담겨 있는 수많은 표정들, 보는 관점과 각도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지는 표정과 심리의 변화 같은 것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웃음 뒤에 숨겨진 슬픔·해학·풍자, 그래픽적인 요소 뒤에 녹아있는 깊이 있는 내러티브, 표면 뒤에 가려진 본질에 대한 함의와 장치를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동구리의 미소를 단순한 밝은 웃음이 아닌 슬픈 기호로서 읽어야할 아이러니와 마찬가지로 권기수의 휘황찬란한 색채적 화면이 단순한 그래픽 디자인적인 단순성을 담고 있는 화면으로 이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지필묵으로 표현된 화면의 깊이와 결에 상반되는듯한 채색적 평면성의 컴포지션, 전통적 주제와 모티프의 내용적 수용과 현대적 도안의 형식적 배치, 인간적 손맛의 흔적과 기계적 정교함의 마무리, 수묵의 표현성과 디자인의 형식성 등 이 이항적 관계의 극단적이고 모순적인 대립 사이에서 동구리는 오간다.
마치 상형문자의 완벽한 구조성에 감탄하듯이 동구리의 문자화, 기호화, 법칙화가 완성됨으로써 권기수의 화면은 더욱더 견고해진다. 지필묵의 표현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따뜻함의 공간 구조에서 시작한 화면은 마치 견고한 가구의 표면과 짜임새처럼, 기계적이고 인공적인 광채와 표면을 가지면서 동구리의 표면은 쿨함이라는 차가움에 도달한다.
화면의 기하학적이고 디자인적인 차가운 감성에 대한 이유를 작가는 디지털시대의 진입을 본격적으로 실용적으로 경험한 최초의 한국화 세대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라고 답변한다. 디지털 화면 속에 전통적인 입체감과 시점을 견지하고 있는 그림과 아날로그적 캔버스 평면에 디지털 이미지를 올려놓은 화면의 차이를 우리는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디지털시대의 한국화는 어떤 표면과 표현법을 획득해야할까. 디지털 미디어에 스며들 수 있는 한국화의 골법용필, 기운생동은 어떤 질감 속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일까. 지필묵의 디지털적인 용필인가, 디지털의 지필묵적인 운용인가.
권기수의 예술의 대중성에 대한 관심, 달리 말해 한국화의 대중적 소비에 대한 관심, 또한 그로 인한 예술작품의 대중적 친화력과 호소력에 대한 인식은 그가 조선시대 여항문화와 중인계층의 사회적·예술적 현상에 대한 오랜 관심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자본주의의 발아와 함께 사농공상의 위계질서가 서서히 붕괴되어가는 사회상 속에서 작가와 그 예술(작품)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화원의 프로페셔널리즘과 선비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사회적 평가의 모순, 작품과 상품으로서의 서화(書畫)의 위상 변화를 우리시대의 상황에 비추어 보고, 대중친화적인―팝적인 코드로도 읽혀질 수 있는― 한국화에 대한 수용이 요구되는 현실을 자각한 것이다.
우리는 회화와 디자인의 경계, 순수미술과 팝아트 간의 경계에 대한 권기수의 해체적 태도를 간파해야 한다. 동구리라는 대중친화적인 캐릭터와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색채의 활용으로 단순히 팝적이라는 카테고리에 권기수를 가둬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팝적인 요소와 디자인적인 요소는 동일시 될 수 없다. 우리 현실 속에서 팝아트라고 규정짓는 주요한 기준들이란 거의 애니메이션이나 망가의 생략적인 단순 평면 이미지, 그리고 그로 인해 유추되는 캐릭터의 창조 같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팝아트의 영역을 축소 해석하고, 팝의 전략적인 정치학을 무시한 편견이다.
권기수 이미지와 색채의 표피적인 해석으로 그의 작업을 팝아트로 규정 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문인화의 정신성을 기본 바탕으로 현대적이고 디자인적인 요소를 활용하여 우리시대의 표현방식과 어법으로 표현해낸 우리시대의 메타문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전통의 현대화’라는 표현보다는 동시대의 시스템으로 똑같이 만들어진 동시대적 언어의 그림 속에 녹아 있는 전통적인 맥락과 어원을 재발견하는 작업이라고 하는 것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최근의 전시 <색죽(色竹)>에서 보여준 버티컬 커튼 월은 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다채로운 컬러의 대나무 이미지를 우리 실생활 속에서도 설치 가능한 버티컬 커튼의 양면으로 출력하여 만든 커튼 월이다. 색의 죽림은 이곳과 저곳, 안과 밖, 더 나아가 이승과 저승, 현실과 가상의 공간을 열고 닫으면서 경계와 구분, 차이와 구별을 해체하는 새로운 차원의 공간을 구축해나간다.
예로부터 현실과 다른 비현실의 공간으로 작용했던 대나무숲, 7현자가 세상을 피해 들어갔던 유토피아의 공간 죽림의 역사적 맥락을 지금 우리의 현실 속으로 끌어온 것이다. 권기수의 전통에 대한 해석과 인식은 이런 식이다. 원래 동양화에는 주로 색죽이 아닌 묵죽이 존재했고, 그가 믹스해서 창출한 색채의 조합은 전통 오방색의 변주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 알게 된다. 살아있는 지금 이곳에 스며든 전통의 중의적 현현. 그것이 전통이 살아나는 방법이다.
지필묵이라는 전통적인 재료에 얽매임 없이 우리시대의 사상과 회화적 관점을 이 시대의 언어와 화법으로 드러내는 것이 진실한 한국화의 모습이며 살 길이다. 전통에 정답이 있고 그 정답에 우리의 현실을 맞추려는 시도가 아니라 지금 이순간의 한국화의 실존을 드러내며 그 속에서 전통의 정체성과 진실성의 흔적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진정한 전통과 현대의 조화, 한국화의 르네상스를 향한 길이 될 것이다.
전통과 현대의 연결짓기에 대한 강박과 책임의식은 서양화 보다 한국화에서 더 강하다. 여기서 무라카미 다카시의 슈퍼플랫이나 나라 요시토모의 겹의 아우라를 권기수의 작업 방향과 비교해보면 동구리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어느 정도 가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그들과 다르고 무엇이 그들과 일치하는가.
동구리가 탄생한지 25년 즈음. 동구리의 성장 과정은 다양한 장르와 형식의 출현으로 활성화 되기 시작했던 ‘영 컨템포러리 한국화’의 진화와 여과와 반성의 과정이며, 한국화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실험과 모색의 시기이기도 하다.(2024)